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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FC, 그 아름다운 이름

케니 달글리시(Kenny Dalglish), 리버풀 전설의 7번, "KING"은 영원히.

케니 달글리시(Kenny Dalglish), 리버풀 전설의 7번, "KING"은 영원히.

리버풀의 킹, 케니 달글리시

 

킹 케니, 스코틀랜드 대표팀 역대 최다 출장, 최다골 기록, 리버풀의

리버풀의 그의 인생의 가장 최고의 시기이자, 가장 마음이 아픈 시기를 함께 겪으며

"리버풀"이란 팀을 심장에 새기며 그라운드를 뛰었던 남자, 케니 달글리시.

 

원래 케니는 스코틀랜드 레인저스의 열혈 팬이었다. 어린 마음에 축구선수로의 꿈을 키운 그였지만, 레인저스는

자신에게 도전할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알아본 감독이 있으니 바로 셀틱의 감독인
"요크스타인"이었다. 그는 케니의 집까지 찾아와 그에게 셀틱에서 뛸 수 있는 자격을 주었고, 케니는 이를 수락하고 

셀틱에 입단하게 된다. 

 

소년 시절 케니.

그 당시 셀틱은 지금의 셀틱과 비교할 수 없는 리그 수준이었다. 달글리시의 집에 찾아온 요크스타인은 셀틱은

유럽 축구 역사상의 처음 트레블을 기록했었고 세계적인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왼쪽부터, 요크 스타인, 케니, 퍼거슨 (와 세 사람 조합...ㅎㄷㄷ)

2년 간의 적응기 후 1971-72 시즌부터 엄청난 활약의 꽃을 피운 케니 달글리시는 셀틱에서 총 204경기에서 112골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남기고 그는 1977년 드디어.

그의 인생의 새로운 역사의 2막으로 향하는 "리버풀"로 향하게 된다.

 

 지난 시간에 나눴던 "밥 페이즐리"감독이 케니 달글리시를 영입하므로 리버풀의 전설의 7번이 등장하게 된다. 당시에 

케니가 리버풀에 오기 전 그의 자리는 리버풀의 레전드 "케빈 키건"이라는 엄청난 스타의 자리였다. 그러나 키건의 7번을 물려받은 

케니는 애송이라는 칭호를 과감히 던져 버리고 오히려 키건보다 한층 업그레이드 된 모습으로 리버풀의 7번으로서의 역할을 완벽히 

수행했고, 밥 페이즐리 감독과 함께 빅 이어를 들어올리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07-08, 08-09 시즌의 "제-토 라인"을, 그리고 현재 "마누라" 라인을 리버풀의 공격 듀오 라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앞서 리버풀의 원조 공격 듀오가 있었다. 바로 "이안 러시와, 케니 달글리시의 공격 듀오"였다. 

 

케니 달글리시, 이안 러시

 이안 러시는 달들리시의 앞선인 최전방에서 직접 골문을 타격했던 전통 스트라이커 위치였다. 이안 러시는 화려한 패스나 상대를 쉽게 제치는 테크닉한 면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현재까지 리버풀에서 세운 골의 기록이 깨지지 않을 정도로 이른바 냄새를 맡는 득점감각이 타고났었다. 그의 별명은 ‘Ghost’ 유령으로, 어느새 수비 옆에 나타나 유유히 상대 골문을 가르곤 했다. 러시의 이런 스타일 덕에 달글리시와 공존도 가능했다. 플레이 메이커였던 달글리시와 득점에 특화된 러시, 마치 스티븐 제라드와 페르난도 토레스의 콤비가 생각나는 원조 콤비였다.

 

 80년대 초 리그 우승을 경험하고 리그컵도 제패하는 등 맹활약을 하였고 83년에는 미셸 플라티니에 이어 발롱도르 2위에 링크가 되었던 케니의 전성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1984-85년 라이벌인 에버튼에게 리그 우승을 내어주고 유러피언 컵에서도 유벤투스에게 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85년도 축구 역사의 가장 마음 아픈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바로 

"헤이젤 참사"

헤이젤 참사

리버풀의 훌리건들의 만행으로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그로 인해 "조 페이건" 감독이 사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리버풀은 

헤이젤 참사 85 5 선수였던 34세의 달글리시를 선수 감독으로 임명하게 되었다. 리버풀은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지만

케니는 선수들을 격려하며 팀을 다시금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채 몇 년이 지나지도 않아, 5년 만에

"힐스보로 참사"를 겪게 되었다. 

 

 힐스보로 참사는 1989 4 15 셰필드 힐스보로 스타디움에서 있었던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와의 FA 준결승전에서 리버풀 서포터 입석에 있던 96명이 질식사한 사건이다. 당시 셰필드까지 교통이 너무 막혀 단체버스로 출발한 리버풀 팬들의 도착이 예상보다 늦어졌지만 FA측이 경기 시작 후엔  입장시키지 않겠다고 상태였기 때문에 지리에 익숙치 않았던 리버풀 팬들이 우왕좌왕하며 입구로 모여들었다다급해진 경찰들은 통제를 하지 않은 출구쪽 문까지 개방해버렸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안으로 밀려들어가게 된.  안 쪽 터널에서 평소에는 경찰이 인원 통제를 했지만 그 날은 그마저도 하지 않았고 앞 쪽 상황을 모른 채 계속 팬들이 들어가게 되면서  자리에서 94 병원에 옮겨진 사망한 2명을 포함 96명의 리버풀 서포터들이 사망했다사건 이후 경찰이 취한 리버풀 팬들이 몰려들어서 사건이 발생한거라며 조작된 발표문을 냈지만 다행히 이후에 제대로 질서 유지를 하지 못하고 1600명까지의 입석에 3000명을 들여보낸 사실 등이 밝혀지게 된

 

사임을 발표한 케니.

 89 4월에 있었던 힐스보로 참사의 스트레스로 91 2(39) 케니는 감독직을 사임하게 된다. 결국 5시즌 동안 올해의 감독상 3. 리그 우승 3. FA 우승 2 커뮤니티실드 4 등 꿋꿋하게 팀을 이끌던 케니는 결국 감독으로선 감당하기 무거운 리버풀의 감독직을 놓고 

그렇게 사임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달글리시가 떠난 이후로 리버풀은 다시는 빛났던 시절로 돌아갈 없었고 리그의 타이틀을 차지하지 못했다....이후 2011년 다시 감독을 대행으로 잡았던 케니였지만 리그를 겨우 8위로 마친 케니는 다시 사임을 하게 되었고, 현재는 리버풀의 열렬한 팬으로 항상 경기 때 혹은 인터뷰의 자리에서 볼 수 있다.

케니 달글리시와 이안 러시

 이제는 세월이 흘러 노년의 자리에서 리버풀을 응원하는 서포터로 있는 킹 케니, 

19-20 시즌 리그 30년 만의 우승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클롭 감독과 함께 축하를 전하던 케니의 눈 속에 

얼마나 리버풀을 사랑하는 지 지금도 우리는 그의 모습을 통해 바라보게 된다. 

 

선수 시절 케니

영원히 우리 속에는 킹 케니가 남아있을 것이다. 지금도 리버풀을 바라보며 그들을 향한

박수를 보내는 당신이야 말로 진정한 박수를 받을 케니 달글리시. 그를 오늘도 응원한다.

 

킹 케니 달글리시

You Will Never Walk Alone.